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산 전투 (문단 편집) === 일본군에게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 1차와 2차 금산 전투에 있어서 조선군의 전과는 사실 완전히 불명으로, 일본군 사상자 5천명 같은 드립이 근거 없이 추가되곤 한다. 난전이라서 가능하다, 전력을 다해서 싸워서 큰 피해를 입혔다. 같은 이야기가 난무하는데, 유럽이나 아프리카 어느 나라 전투라고 가정하고 생각해보면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승패 자체를 뒤집지는 못하니까, 상대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3일 운운하는 기록의 출처는 조헌의 문집인 중봉집이다.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확정할 수 없지만 만취당실기와 쇄미록, 죽봉황공유적의 기록을 신뢰해 [[이치 전투]]의 개전 시점을 2차 금산 전투로 이후로 본다면 더더욱 신뢰성이 떨어진다. 당장 전투 끝나고 2일 후에 조헌의 동생이 조헌의 시신을 수습하러 오는 장면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즉 이 둘이 양립한다면, '''조선군과 일본군은 같은 날 같은 전장에서 화목하게 시신을 수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일본군은 전장을 이탈하였고 시신 수습은 후방으로 시신이 이동 중임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다음날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는 이미 일본군은 전장에서 이탈하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심지어, 적을 전멸시킨 일본군은 시신을 다 수습하지 못하고 전장을 떠나고 오히려 조선 측이 본격적으로 모든 시신을 수습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역사서의 기록을 볼 때, 일본군은 당일로 자군 시신을 수습하고 전장을 떠난 것이 분명하다. 조헌의 동생 조범이 병력도 없이 와서 조헌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전장이 텅 비어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